발음과 억양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 도구가 아니라 그 사회가 가진 문화적 지층과 계급적 그림자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억양과 발음은 그 중에서도 가장 직관적인 신호다. 예컨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미국 남부의 Southern drawl을 예로 들자면, 길게 늘어지는 모음과 완만한 리듬은 듣는 순간 어떤 이미지를 환기시킨다.
"주말 예배, 달콤한 아이스티, 그리고 넓은 마당이 있는 집."
미국인들조차 그 억양을 들으면 ‘환대와 가정적인 따뜻함’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린다. 나는 이 억양이 가진 서정성을 좋아해서 남부 억양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유튜브 채널까지 챙겨봤다. 매일 듣다 보니 억양이 단순한 발음의 변주가 아니라, 그 사회의 정체성과 태도를 압축한 상징임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나는 여전히 아직 가본 적도 없는 텍사스와 먹어본 적도 없는 오크라 튀김에 대해 좋은 이미지가 있다.
두 번째로 좋아하는 미국 억양은 보스턴 억양인데, 영화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이탈리아계 이민자의 흔적이 남아 묘하게 굴곡진 모음, 특유의 거친 울림이 귀에 오래 남는다. 호주나 남아공의 자유롭고 명랑한 억양, 슬라브권의 모국어의 질감을 그대로 반영하는 이국적인 깊이도 좋아한다.
싱가포르에 다녀온 뒤로는 한동안 말레이/싱가포르 억양을 파고들었다. 흔히 말하는 말 끝의 -la보다, 영어에 성조를 입힌 듯한 억양, 싱가포르 내에서만 듣던 특정 어휘 사용이 현지인들의 환대와 합쳐져 너무 사랑스러웠다.
영국의 억양은 말 그대로 계급을 발음으로 드러낸다. RP(Received Pronunciation)는 BBC 앵커들이 쓰는 ‘표준영어’이자 상류층의 억양이다. 단정하고 매끄럽지만, 동시에 거리감이 있다. 흔히 posh accent라고 부른다. 반대로 Cockney는 런던 노동계층의 억양을 대변한다. 탈락음이나 글로털 스톱(glottal stop) 등 특유의 발음 습관이 있고, 한때 ‘촌스럽다’는 편견의 대상이었지만 지금은 문화적 개성으로 존중받는다.
미국에서도 억양과 사회적 이미지가 분리되지 않는다. Southern drawl은 따뜻함과 유머를 연상시키면서도 ‘보수적’이고 ‘전통적’이라는 편견과 함께 소비된다. 억양 하나로 누군가의 사회적 배경을 가늠하려 드는 시선은 흥미롭지만 동시에 위험한 함정을 품고 있다.
발음과 편견
한국 사회에서 발음을 둘러싼 논쟁은 오래전부터 이어져왔다. 여전히 ‘영어 발음이 완벽하지 않으면 영어를 못한다’는 인식이 남아 있다. 하지만 발음은 유창함의 전부가 아니다. 발음이 아무리 좋아도 말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한다면 소용없다. 나에게는 발음 그 자체가 흥미 대상일 뿐, 절대 상대방의 언어 실력을 가늠하는 척도로 삼지 않는다. 내용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발음을 소홀히 할 수만은 없다. 적어도 상대방이 알아듣는 수준의 발음은 기본적인 예의가 아닐까. 심각한 악필로 쓴 글을 볼 때, ‘문자 표기는 사회적 약속인데, 이렇게 못알아 보게 쓸 거면 왜 썼을까’라는 생각이 진지하게 든 적이 있다. 발음도 비슷하다.
흥미롭게도 유럽인들은 발음에 대해 한국보다 더 미묘하게 예민하다. 다양한 이민자 억양에 익숙해 ‘다양성’을 존중하면서도, 발음이 유난히 정확한 사람에게는 과장 없는 칭찬을 건넨다. 독일에서는 억양이 지나치게 강하면 본인들끼리도 “Hochdeutsch(표준 발음)으로 해 달라”고 할 정도다.
대학원 시절 수행 통역을 할 때 독일 기업인 아저씨들이 “발음이 독일인 같다, 살다 왔냐”고 묻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일정 중 아침에 내가 “Haben Sie Kater?(숙취가 있으세요?)”라고 묻자, 그분이 잠시 “Haben Sie Karte?(카드 있으세요?)”로 알아듣는 해프닝이 있었는데, 내 의도를 이해하고 웃어 넘기셨다.
프랑스어 과외를 받을 때는 “부모님이 프랑스인이냐”는 질문을 들었다. 내가 보기엔 그 정도는 아닌데, 다른 학생들의 발음이 그만큼 안 좋았나보다. 내가 배웠던 모든 언어에서 발음이 좋다는 칭찬을 받았다. 나는 그만큼 집요하게 연습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발음이 언어 실력의 전부는 아니지만, 정확한 발음이 주는 인정과 신뢰는 분명히 있다.
억양은 모방의 산물
억양은 노출된 환경의 산물이다. 나 역시 처음 영어를 배울 때 미국에서 살았기에 자연스럽게 미국식 억양이 몸에 배었다. 브리트니 스피어스를 집착하듯 들었던 시절, 대학 때 캘리포니아 출신 친구들과 어울린 것 모두 지금의 억양에 영향을 줬다. 대학생 때 약간 어색한 영국 영어를 구사하던 사람을 봤는데, 흥미롭게도 영국에서 짧게라도 유학한 사람들은 어김없이 영국식 억양을 흡수한다. 북미 억양이 지배적인 교육 환경에서 영국 억양을 듣는 것이 처음엔 낯설었지만 곧 납득이 갔다.
모방의 중요성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던 나는 독일어를 배울 때도 ‘모방 대상’을 신중히 골랐다. 여러 사람을 거쳐 최종적으로 남은 유튜버 두 명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출신이었다. 특히 뒤셀도르프 출신 여성의 발음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영상을 보며 메모를 하고, 그녀의 표현을 따라 혼잣말을 하며 익혔다. 개인 채널의 매력은 교과서엔 없는 생생한 언어가 쏟아져 나온다는 점이다. 더구나 내 또래 여성들이어서 유용한 표현들이 많았다. (얼굴이 부었다 등...) 나는 덕분에 그들의 구독자 수가 점점 늘고, 대중매체 출연, 연애, 이별, 결혼, 출산, 가슴 확장술 부작용, 이혼 등의 과정까지 지켜보면서 마치 장기 인류학 실험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취향에서 제외된 억양도 있다. 예를 들어 ch를 sh처럼 발음하는 헤센 지역의 습관은 어쩐지 귀에 거슬렸다. 바이에른주 억양은 독일의 ‘텍사스’라 불릴 만큼 강한 개성이 있는데, 통역 자료로 만났을 때 이해하기가 힘들어 눈물이 찔끔 흐른 후로는 약간의 거리감을 느낀다.
발음을 향한 집착
나는 발음에 유난히 민감하다. 남의 발음도 잘 잡아내지만, 내가 잘못 발음했을 때 특히 민감하게 반응한다. 내 학습 체계에서 발음, 청해력, 어휘는 긴밀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어를 배울 때도 리아종을 뚫어 듣고 받아쓰는 데 몇 달을 쏟았다. 프랑스어 발음도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 에디트 피아프의 옛 노래에서는 혀를 굴리는 r이 강하게 들리지만, 현대 프랑스어는 대부분 목구멍 r로 대체되었다. 이 목구멍 r은 독일어에도 있다. 대학 수업에서 목구멍 r을 포기하고 h로 발음하는 학생들을 보면 순간 움찔했다. 프랑스어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전에는 “La Vie en Rose”를 내놓고 ‘라비앙호즈’라 표기하기도 했었다.
사실 발음을 두고 답답했던 적은 많았다. “명백히 다른 소리를 왜 구분 못하지?”라고 생각하곤 했는데, 어느 날 깨달았다. 친했던 한 독일어 교수님은 한국인 남편과 살며 한국어를 꽤 열심히 배우셨지만, ㅊ과 ㅈ을 헷갈려 늘 내게 확인하셨다. 그걸 보고 사람마다 귀의 민감도가 다를 수 있겠다고 납득했다.
결국 이 집착은 나의 덕후 기질이다. 발음을 얼마나 중시하느냐는 각자 다르고, 절대적인 실력의 척도도 아니다. 나보다 훨씬 뛰어난 교수님들도 한국식 억양이 강한 경우가 있다. 다만 나는 발음과 억양을 언어의 음악성을 체감하는 창구이자, 문화의 한 단면으로 본다. 사람과 문화를 더 깊이 이해하려는 일종의 집요한 애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