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보드 워리어의 양성에 대하여
발화 욕구와 사회적 결핍, 즉각적 보상이 만나면 누구든 ‘키보드 워리어’가 될 수 있다.
나는 20대 초중반, 1년 남짓 외시를 준비했다. 기간은 짧았지만, 번호를 세 번 바꾸고 세상과의 연결을 거의 끊었다. 노량진까지 가기 싫어 집에서 인강을 들었으니, 말 그대로 외딴섬이었다.
그런데 훗날 돌아보니, 이 고립의 시기에 기묘한 변화가 있었다. 현실에서는 누구와도 거의 말을 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쉬는 시간에 접속한 인터넷에서는 활동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이다.
나는 원래 댓글을 거의 쓰지 않는 편이고, 그때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당시 혼자 시간을 보내는 1년이 넘는 기간 동안은 나도 모르는 새 키보드를 두드리는 활발한 네티즌이 되어 있었다.
인간에게는 발화 충동(Mitteilungsbedürfnis)이라는 것이 있다. 뇌는 말하기 자체를 보상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출구가 막히면 가장 저항이 적은 방향으로 새어 나가는 것이다.
물론 나는 악성 댓글을 단 적은 없다. 다소 괴짜 같았을 뿐이다. 내 활동 무대는 주로 역사, 국제정치, 외국어였다. 예를 들어 네이버 전쟁 기사에 “유엔은 군사 파견 안 하나요?”라는 댓글이 달리면, 혼자만의 정의감이 끓어올라 유엔 헌장의 몇 조 몇 항을 조목조목 적으며 ‘유엔에는 상설군이 없다’는 사실을 설명했다.
나무위키에서 내가 존경하는 레이건 대통령이 모욕당하는 것을 보고는 분노를 삭이지 못해 직접 내용을 수정했다. 구독하던 Foreign Affairs지에서 제대로 된 국제정치 글이 줄어든 것을 아쉬워하던 와중에, “전 세계의 성교육” 특집을 실은 편집장 기디언 로즈에게 “현대 국제정치사의 획을 그은 이론이 탄생한 이 명성 높은 학술지에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냐”는 투의 얼간이 같은 항의 메일을 보냈고, 그에 대한 변명조의 답장을 받은 적도 있다. (이건 후회가 없다. 왜 명망 높은 학술 잡지에 롤링 스톤즈 급의 글을 실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또, 어떤 물리학 교수의 강의 영상 밑에 “I wish I were his student”라는 무해한 댓글을 달았다가 누군가 내 영어를 시비 걸었을 때는, 억울함이 분노로 번져 장문의 논문 같은 반박글을 써 내려갔다. 그런데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고, 그 사실이 오히려 화를 더 부채질했다. 결국 모든 글을 지워버렸다.
누가 보면 “저 사람은 문제가 있나?”라고 할 수 있겠지만, 고시 공부를 접고 나서는 이런 행동 패턴이 완전히 사라졌다. 지금 돌아보면, 이는 ‘혼자 집에 틀어박혀 공부만 하는’ 억눌린 억울함을 우월감으로 상쇄하려는 심리적 보상 과정이었다. 그 속에서 사회적 상호작용 결핍 → 온라인에서의 대체 발화 → 순간적 쾌감 → 강화(reinforcement)라는 전형적인 보상 회로가 작동했다.
특히 ‘누군가 틀렸을 때 교정하고 싶은 충동’은, 진화심리학적으로 집단 내 지식 질서 유지 본능과 지위 경쟁 욕구가 결합된 감정이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상황이 고립될수록 더 날카롭고 공격적인 형태로 표출됐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점은, 누군가 시비를 걸었을 때 느낀 분노가 놀라울 만큼 말초적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성적 논박에서 오는 지적 쾌감이라기보다, 오랫동안 억압된 자극이 해방될 때 폭발하는 반사 작용에 가까웠다.
태생이 평화롭고 무해한 나조차 이랬는데, 하물며 깊은 심리적 상흔을 지닌 이가 고립된다면, 억눌린 감정은 쉽게 혐오와 공격성으로 변환되어 댓글창 곳곳을 배회할 것이다.
아마도 ‘키보드 워리어’는 악의에서만 태어나는 존재가 아니다. 발화 욕구 + 사회적 고립 + 즉각적 보상이라는, 너무나 인간적인 삼박자 속에서 배양된다. 단지, 어떤 이는 그 무대를 논문집 위에 펼치고, 어떤 이는 뉴스 댓글창 위에 펼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