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리어 단상
아직도 종종 회사를 다닌다는 사실이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회사 생활을 시작한 것은 불과 4년 전 코로나 시절로, 완전한 원격 재택 근무 형태였다. 당시 나는 통번역 프리랜서 일을 1년 정도 한 것을 제외하면 사회 생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상태였다. 첫 근무를 앞둔 나의 마음가짐은 어린 시절 저항 없이 주입된 두 가지 원칙에 기반했는데, 첫째는 “남에게 고용되었을 때의 월급의 3배를 벌어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일을 하라"는 어느 불교 가르침에 기반한 노동 윤리관이었고, 둘째는 남이 보지 않을 때 더욱 삼가고 조심하라는 신독(愼獨)의 덕목이었다. 내 회로가 단순한 탓인지 조기 교육(세뇌?)의 힘인는 모르겠지만, 약간 희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내 가치관의 일부로서 자리잡고 있다.
IT 업계는 모든 측면에서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청교도적 노동관에 의해 집요하게 시달린 동시에 거의 평생을 언어 외골수로 살다가 처음으로 접한 블록체인은 나에게 공황 상태에 가까운 가면 증후군(imposter syndrome)의 경험을 선사하기도 했다. 이러한 조건은 나를 강렬한 투쟁-도피 반응 상태로 몰아 넣었고, 이는 결과적으로 과도한 열정으로 표출되었다. 처음이다 보니 실제 결과물이 훌륭했는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지만, 지금 떠올리기 다소 민망할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하루 8시간 내내 일관된 업무 강도를 유지한다는 것이 힘들다는 사실도 몰라서 재택 근무 와중에도 점심 시간에 뻗어버릴 정도로 집중력을 혹사시켰다. 조직 내 업무 R&R에 대한 개념조차 없었기 때문에 최대한 많은 일과 그 이상을 하려고 안달했다. 원격 근무와 스타트업이라는 상황 덕분에 일부 용납되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그 과정에서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 시기가 궁극적으로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어느 순간 초년생의 마법이 풀리고 아드레날린 분비가 정상화되면서 내가 하는 일의 의미에 대해 근본적인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단순하게 보자면 나는 회사의 성공에 기여할 수 있도록 기술적 내용의 글을 작성하도록 고용된 사람인데, 진정한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진실된 열정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점점 가치관과 책임감의 관성으로 일을 하는 내 모습을 인지하게 되었고, 그 시점부터 회의감이 무겁게 짓누르기 시작했다. 계약 관계를 배제하면 사실상 회사의 성패와 흥망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주변에 질문도 해봤지만, 필요한 답을 해주는 사람도 없었고 공감 자체를 받지 못했다. 마음이 매우 불편했다. 회사와 입장을 동일시 하기 위해 아무리 스스로를 세뇌해봐도 소용이 없었다. 내면의 아우성을 입막음할 정도로 금전적 보상이 높았다면 달랐을까? 하지만 단순 금전을 매개로 열정을 연명시킨다 한들 결국엔 허무하지 않을까? 물론 성취감이나 자기 효능감, 경험과 이력의 축적 자체는 굉장히 유의미했지만, 나는 회사가 내는 성과나 처한 상황에 근본적인 관심을 가지고 진심으로 임하고 싶었고, 여전히 그렇다. 내 순진한 욕심일 수도 있다.
결국에는 뜬구름 같은 블록체인에서 시작하여 점점 더 의미있고 진심으로 가치에 공감할 수 있는 업계를 찾기 위해 본의 아니게 잦은 이직을 하게 되었다. 궁극적으로는 나만의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하겠지만, 그 과정에서 내가 경험하는 조직에 대해서는 최대한 감정적 동일시를 이루면서 진심을 다 하고 싶었다. 그래서 최근에는 여러 회사와 창업자의 비전 등에 큰 관심이 생겨 더 유심히 보게 되었다. 하드웨어를 다루는 현재 회사에서는 그나마 가장 큰 안정감을 느끼고 있지만, 인생을 길게 본다면 이런 고민은 앞으로도 진행형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