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딱한 복숭아
복숭아의 단단함을 향한 집요한 애정, 희소성과 소비자의 딜레마
여름이면 나는 딱딱한 복숭아를 기다린다. 일차적으로는 아삭한 식감을 좋아하기 때문이고, 말랑한 복숭아는 과즙으로 인한 후처리가 번거로워서 집에 들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단맛이 없어도 괜찮다. 아삭아삭한 복숭아는 덥고 불쾌한 여름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존재다.
그런데 구하기가 힘들다. 인터넷에서 주문을 여러 번 해봤지만, 매번 말랑한 복숭아가 왔다. 신의 성실의 원칙에 기대어 거래를 했지만, 세 번 기만당한 끝에 나는 깨달았다. 기대는 통제할 수 없고, 결과는 늘 미끄러진다. 그래서 리뷰를 보기 시작했는데, 피해자들의 사례가 많았다. 이제는 아예 딱딱한 복숭아를 찾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워졌다.
시간이 지나면 단단한 복숭아는 말랑해지지만, 말랑한 복숭아는 절대 다시 단단해지지 않는다. 단단함은 복숭아에 있어서 희귀하고 까다로운 속성이다. 그래서 그런지 아무리 검색해도 품절이고, 어떻게든 파는 곳을 찾아 주문하면 말랑한 복숭아를 보내주는 이 고리에 몇 년째 갇혀 있다.
물론 백화점에 가면 4만 4천원에 4개를 살 수 있다. 말도 안 되는 가격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납득은 간다. 백화점은 시장 내 단단함의 희소성을 계산에 넣은 것이다. 단단함은 이제 가격이 붙은 자산이다. “믿고 사세요. 단단함을 보장합니다”를 외치는 듯한 당당한 스탠스는 어떤 면에선 철학적이다. 정직한 프리미엄, 그 대가를 감수하라는 냉정한 세계의 메시지.
하지만 한 알에 만원을 주고 복숭아를 사기 싫다. 복숭아뿐 아니라 사과, 배도 마찬가지다. 물론 사먹을 수는 있다. 하지만 ‘할 수 있음’이 곧 ‘하고 싶음’을 의미하진 않는다. 무언가에 많은 돈을 지불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소박한 욕망이 아닌 소비적 선언이 된다. 나는 복숭아에게 그런 선언을 하고 싶지 않다.
여름 내내 1일 1복숭아를 소비한다면 약 5-60만 원이 든다. 살 수는 있지만, 거부감이 든다. 왜일까? 이성적으로는 효용을 주는 합리적인 소비일 수 있지만, 감정적으로는 납득되지 않기 때문이다. 복숭아 적금을 들어볼까 생각해도, 만기가 되면 다른 데 쓸 것 같다. 복숭아는 투자처가 되기엔 너무 감각적이고, 너무 사소하며, 너무 인간적이다.
나는 올여름 딱딱한 복숭아를 먹을 수 있을까.
아니면, 이번 여름도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기대하는 그 감정을 반복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