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 독학하기

회화 독학하기
Photo by Joshua Hoehne / Unsplash

들어가며

필자는 언어 공부할 때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학습 과정 자체에서 강렬한 몰입과 즐거움을 느낀다. 언어 공부를 후원해주는 메디치 같은 존재가 있다면 평생 앉아서 언어 공부만 하고 싶을 정도다(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기에 그나마 연관이 있는 글쓰기를 살린 커리어로 나름 만족하고 있다).

짧은 미국 체류 후 영어 특기자로 입시를 했고, 통번역대학원에서는 독일어를 전공했다. 취미로 공부한 언어가 8개가 넘는다. 프랑스어는 잘 맞아서 5권의 출판 번역 기회가 주어지기도 했다. 2024년 8월 기준 현재는 아랍어와 아프리칸스어에 집중하고 있다.

문법과 독해는 독학이 수월한 편이지만, 혼자서 회화 실력을 키우는 것은 상당히 까다로운 일이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유명한 플랫폼이나 애플리케이션을 포함한 다양한 방법으로 회화 공부를 시도해보았고, 그 과정에서 정착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공유한다.

*증명하기 애매한 부분이지만, 어느 외국어를 공부하든 해당 모국어 화자들에게 교포냐, 오래 살다 왔냐는 말을 많이 듣는 편이라 개인적으로는 효과가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본 글의 내용은 필자가 모든 언어를 공부할 때 기본적으로 적용하는 방식이지만, 공부 흔적이 가장 많은 독일어를 기준으로 작성이 되었다. 글 말미에 독일어 학습 자료도 공유했다.

회화 독학 3단계

답답함 느끼기

영어는 미국 체류 경험과 3년 간의 짧고 굵은 브리트니 스피어스 덕질 덕에 회화에 문제 없지만, 독일어는 순수 국내파로서 인위적인 인풋을 주입해야 했기에 시작점이 달랐다.

특히 통번역대학원에서는 주로 연설문을 다루는데, 실제 독일인과 일상 대화를 나눌 때면 매번 숨막히는 답답함을 느꼈다. 연설문에 등장하는 고급 어휘나 표현만으로는 실제 나의 가치관, 경험, 의견이 반영된 말을 하기가 어려웠고, 상대의 말을 경청하면서 진정 나다운 반응을 할 수가 없었다. 언어는 결국 소통의 수단인데, 단순화된 표현에 한정된 이 현실을 타파하고 싶었다.

예를 들면 독일인 견주를 만났을 때 강아지 발톱을 깎다가 피가 나서 패닉했던 경험이나, 중성화 수술 후 체중이 증가해서 고민이라는 것을 자유롭게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이 답답함이 축적되면서 약간의 광기가 발동했고, 학습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 하지 않았던가. 독일인 교수님과의 스몰토크나 통역 현장에서 만난 독일인들과의 대화에서 답답함을 느낀 포인트가 있으면 무조건 메모를 하고, 집에 와서 정리를 했다.

주제별 표현 정리하기

암기가 피할 수 없는 관문이다. 필자는 사실 웬만한 독일어, 영어, 프랑스어 단어는 한두번 보면 외우지만(중국어, 일본어는 예외였고, 그래서 중단했다), 설사 단번에 기억을 할 수 없더라도 반복하면 결국엔 외워진다. 나에게 아랍어와 러시아어가 그러했다.

하지만 막무가내로 어휘를 암기하는 것은 효율적이지 않다. 예컨대 나는 아직 살면서 18살 때 암기한 hirsute, pulchritudinous라는 영어 단어나 23살 때 외운 Duckmäusertum이라는 독일어 단어를 직접 써본 적이 한번도 없다(높은 수준의 글을 읽을 때는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나는 그래서 어떤 주제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을 의식의 흐름대로 정리했다. 아래는 한창 독일어에 몰입하던 시절 만들었던 목록 예시이다.

당시 한창 발레를 배우고 있었다
초밥을 보고 생각나서 정리했다
손으로 정리하기도 했다.

추가로 독일인 특유의 빈정대는 말투를 탐구하기 위해 구글 맵에 들어가서 평점이 낮은 식당을 골라 리뷰를 보고 정리해놓기도 했다.

혼잣말하기

원어민을 대상으로 연습을 할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독학을 한다는 것 자체가 그러한 여건이 안 되는 경우일 것이다.

온라인이나 앱으로 스터디 파트너를 찾을 수도 있지만, 본인의 경우 유의미한 학습으로 이어진 케이스는 지난 10년 단 한건에 불과했고(프랑스 친구 멜로디를 이렇게 만났다), 이마저도 운이 좋았다고 본다.

그 대신 기회가 될 때마다 독일어 일인극을 벌였는데, 밥 먹을 때, 운동 할 때, 길을 걸을 때 시도 때도 없이 혼잣말을 했다. 독일어의 경우 개인적으로 발음이 마음에 들었던 서독 출신 유튜버 한 명을 지정해 기준으로 삼았다.

이 모든 과정을 매일 길게는 10시간씩 반복하다 보니 2년 정도 후에는 실제 독일 체류 경험이 거의 없었음에도 어느 정도 회화가 가능해졌다.

외국어로 진정 나답게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해방감을 준다. 이 모습을 상상하면서 현실과의 괴리를 좁혀나가는 과정을 즐기는 것이 관건이다.

맺음말

비단 언어 학습에만 해당되는 사실은 아니지만, 단순히 어떤 것에 시간을 투자한다고 실력이 상승하지 않는다. 답답함은 잘 하고 싶은 마음과 현재 상태의 괴리에서 비롯되는데, 이 감정을 잘 활용하면 폭발적인 모멘텀이 생긴다. 외국어로 진정 나답게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해방감을 준다. 이 모습을 상상하면서 현실과의 괴리를 좁혀나가는 과정을 즐기는 것이 관건이다.

독일어 학습 자료 추천

  1. dict.cc
    1. (영어가 된다면) 단연컨대 독일어에 최고의 학습 자료다. 단어 뿐 아니라 유용한 통문장도 많이 있다.
    2. 안타깝게도 다른 언어쌍들의 경우 표제 수가 많지 않다.
  2. context.reverso.net
    1. 특정 단어를 검색하면 웹 스크롤링을 통해 수 많은 예시 문장을 보여준다.
  3. 온라인 포럼(상급자 추천)
    1. 구어체가 많이 섞여 있는 생생한 독일 누리꾼들의 언어를 배울 수 있다.
    2. 예를 들어 임산부 포럼을 찾는다면 구글에 "Schwangerschaft", "Forum"을 검색하면 된다.
  4. GuteFrage(상급자 추천)
    1. 지식인에 해당하는 사이트로, 차갑지만 따뜻한 게르만족의 진지한 답변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