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사랑에 대해 내가 착각한 것들

그러나 사파리 이후, 내 사랑의 실체를 낯설게 마주하게 되었다. 그것은 집착과 소유욕의 농도를 띠고 있었고, 자기 충족적인 동시에 다소 일방적이었다.

자연과 사랑에 대해 내가 착각한 것들

자연은 아름답다. 그러나 나는 자연 그 자체를 우상화하지 않는다. 이미 수백 년 전 토마스 홉스가 자연을 “고립되고, 빈곤하며, 역겹고, 야만적이며, 짧은 삶”이라 정의했듯, 날것의 자연은 거칠고 위협적이며, 인간에게 결코 우호적인 환경이 아니다.

만약 내가 크루거 국립공원 한가운데에 홀로 남겨졌다면, 기린의 뒷발질이나 코끼리의 발, 개코원숭이의 집단 공격, 혹은 얼룩말의 무리에 찢겨 죽는 극적인 위협을 피하더라도, 머지않아 블랙맘바에게 물려 고통스럽게 죽거나 이상한 열매나 말라리에 같은 것에 노출되어 죽을 가능성이 높다. 나는 분명 동물을 사랑하고 생명을 소중히 대하지만, 동시에 인간 문명과 과학 기술의 진보는 위대하다고 믿는다. 도시가 좋다.

크루거 국립공원에서 사파리 투어를 할 때, 기린이든 코끼리든 처음에는 신기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체감 효용은 급격히 떨어졌다. 동물원과 달리 야생동물과의 조우는 순전히 운의 영역이다. 차로 3~4시간을 달려 공원 중심부로 들어가며, 창밖을 끊임없이 응시해야만 했다. 나는 ‘천혜의 자연, 아름다운 야생 동물, 환경’을 되뇌며 스스로 몰입하려 애썼다. 실제로 너무 감사한 경험이었고, 경관도 충분히 인상적이었지만,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현지 마트에 가서 소고기나 과일 가격을 한국과 비교하거나, 영양제 성분을 분석하는 것이었다.

많은 이들이 문명 사회에 산다는 것에 대해 은근한 죄책감을 느끼고, 아프리카와 미개발 자연을 일종의 순수성으로 이상화한다. 나 또한 막연히 그렇게 느껴야 한다고 여긴 탓인지, 깊은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을 때 자괴감이 들어 원인을 규명하고자 애썼다. 문명에 찌든 것인가? 복내측 전전두엽피질의 기능에 문제가 생긴 것인가? 역시 도파민 중독인가?

이런 복합적인 자기 성찰이 있었기에, 누군가 “아프리카 어땠어?”라고 물을 때 진심으로 답하는 일이 쉽지 않다. 그 질문은 단순한 감상 이상의 것을 요구했고, 나는 그것에 간단히 반응할 수 없는 상태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숙소 뒷마당에 거위 두 마리가 찾아와 빵조각을 던져줄 때, 개코원숭이들이 차 위에 올라 뛰어다닐 때, 그제야 내 안에 활기가 돌았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물은 끝에 내린 결론은, 내 사랑이 저급하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부터 C.S. 루이스에 이르기까지, 사랑은 그 성격에 따라 다양한 층위로 구분되어 왔다. 욕망과 소유에 기반한 애착은 가장 낮은 수준의 사랑이며, 반대로 무조건적이고 자기희생적인 사랑, 아가페는 가장 높은 차원에 속한다.

아가페는 인간의 평범한 의지만으로는 도달하기 어려운 이상에 가깝다. 신앙적 헌신이나 도덕적 확신에 뿌리내린 가치로, 일상적 관계 속에서 구현되기 어려운 추상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남아공 사람들의 동물에 대한 태도 속에는, 그 추상의 일면이 현실로 구현된 듯한 깊은 경외심이 배어 있었다. 어릴 때부터 수십 번 사파리를 다녔음에도, 저 멀리 코끼리가 보이면 마치 처음 보는 듯 망원경을 들고 흥분한다. 수백 마리쯤 본 얼룩말과 기린에도 여전히 신선한 감탄을 보낸다.

나도 동물을 사랑한다. 적어도 그렇다고 생각해왔다. 몇 년 전 세상을 떠난 반려견들은 아직도 꿈에 나오고, 분기마다 한두 번은 울면서 잠에서 깬다. 그러나 사파리 이후, 내 사랑의 실체를 낯설게 마주하게 되었다. 그것은 집착과 소유욕의 농도를 띠고 있었고, 자기 충족적인 동시에 다소 일방적이었다.

나에게 개란, 단추 같은 코, 축축한 주둥이, 매끈한 검정 입술, 온기가 도는 혓바닥의 감촉을 통해 애정을 나누는 존재였다. 잠든 틈에 배에 귀를 대고 심장 소리를 들어야 마음이 놓였고, 간식을 주며 자의식 없는 저작 운동을 지켜보는 것이 큰 기쁨이었다.

야생성을 잃고 통통해진 몸을 무릎 위에 올려두고, 그 따뜻한 존재감을 만끽하며 쓰다듬고 끌어안는 순간들, 그 모든 애정은 나의 만족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사랑이라 믿었던 감정은, 실은 상대의 존재를 통해 내 감각을 충족시키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개인적 욕망을 기반으로 한 저급한 사랑.

반면 남아공 사람들의 사랑은 직접적인 접촉이나 반응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멀리서 조용히 바라보며, 존재 자체를 향한 경외를 표현한다. 거리 두기를 기반으로 한 그 애정은 오히려 더 고결하게 느껴졌다. 반면 나는 상호작용이 없으면 흥미를 잃고, 반응이 없으면 애정이 흐려진다. 나의 사랑은 대상에 대한 감탄이 아니라, 결국 나 자신에 대한 충족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