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언증
허언증 환자에 대한 회고록
요즘 범죄 다큐멘터리를 집중 시청하고 있다. 단순히 자극을 좇는 게 아니라, 이론으로 배운 인간 심리를 실제 사례에 대입해보기 위해서다.
수많은 케이스 스터디를 거치며 깨달은 한 가지는, 욕망은 늘 단순하고, 인간은 그걸 포장하느라 복잡해진다는 것. 그 본질은 언제나 '결핍된 욕망'이다. 사이비 교주는 권력을 위해 세뇌하고, 치정 살인범은 욕망을 위해 가족을 제거한다. (물론 개중에는 아무 이유 없이 동물을 죽이는 등 완전히 고장난 인간들도 있다.)
이 수많은 범죄자들 사이에서 약방의 감초처럼 발견되는 공통된 존재가 있다. 바로 공상 허언증(Pseudologia Fantastica). 거짓말이 인격의 뼈대를 대신하는 사람들이다.
허언증 자체는 보다 보면 진부하다. 정말 숨 막히는 건 그 주변 사람들이다. “설마”로 시작해 “여기까지 왔는데…”로 끝나는 매몰비용 오류에 스스로를 밀어 넣고, 거짓말에 끌려다니다가 어느 순간 “무엇이 진짜였는지” 감각 자체를 잃는다. 이미 쏟아부은 감정과 자원이 아까워, 허언증 환자의 궤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답답해진다.
그러다 문득 뇌리를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내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 허언증 지인, 초등학교 동창, 혜수.
떡잎부터 다르다
혜수는 사실 지금 혜수가 아니다. 2021년, 그녀는 돌연 개명 소식을 전해왔다. 물론 나는 그 사실을 믿지 않지만, 그녀의 주장에 예의를 갖추는 차원에서 안심하고 그녀의 구명(舊名)을 사용하겠다.
우리는 초등학교 동창이었다. 혜수는 처음 만난 사람과 금세 친해지는 재능이 있었다. 문제는 관계 유지력이 하루살이 수준이었다는 점이다. 돈을 빌리면 안 갚고, 금방 탄로날 거짓말은 숨 쉬듯 하고, 약속은 예고 없이 증발했다. 평판은 당연히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내가 몇 년간 그녀를 곁에 허용했던 이유는 단 하나다. 애초에 혜수가 하는 말을 전혀 믿지 않았고, 그래서 나에게 영향력 행사를 못했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의 발언 신뢰도를 1.0으로 둔다면, 혜수에게는 0.2 정도를 적용했다. 물론 혜수의 말에 진실이 섞여 있을 때도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거짓말을 빚는 재료’ 역할을 하느라 곧 힘을 잃었다.
그렇다고 내가 혜수를 싫어했던 것은 아니다. 혐오도 아니고, 우정도 아니고… 그냥 적당한 측은함과 적당한 거리감이 공존하는 관계. 오는 길은 열어두되, 가는 길은 잡지 않는 방식. 다만 돈을 빌려 달라하면 거절했다. 내가 먹을 것은 자주 줬던 것 같은데, 절대 금전 거래를 하지 않고, 딱히 정서적 깊이를 기대하지 않으니 감정 소모가 거의 없는 관계였다.
나의 유년기 시절 인간관계란 대체로 그랬다. 기준도 없고, 분별력도 약하고, 그냥 자연스럽게 방치하며 흘러갔다.
사건 1: 인서울 대학과 나르시시즘적 격노
고등학교 진학 후 자연스레 소거되었던 혜수가 다시 등장한 건 입시가 끝난 직후였다. "나 성신여대 붙었어!"
혜수의 지적 능력과 학업 성취도를 수년간 관찰해온 나로서는, 그녀가 3개월 넘게 알바를 했다고만 했어도 장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런데 성신여대라니. 감동적이었다. 솔직히 말해 잠시 믿었다. 입시라는 거대한 생애 과업 앞에서 거짓말을 할 리 없다는, 나의 안일한 휴리스틱 탓이었다.
하지만 얼마 뒤, 다른 동창을 통해 들려온 진실은 역시나였다. 혜수는 대학 문턱도 밟지 못했다. 그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 '툭' 하고 끊어졌다. 가짜 합격 소식에 진심으로 기뻐했던 나의 정서적 연대가 기만당했다는 사실에 배신감이 들었다.
나는 혜수가 합격했다던 대학의 OT 일정을 확인했다. 그리고 미끼를 던졌다. "OT 어땠어? 무슨 가수 왔다던데." 예상대로 혜수의 진술은 허점 투성이었다. 아직 아마추어였던 혜수는 아무도 확인하지 않을 세부 항목을 위한 시나리오를 만들지 않았던 것이다. 김이 빠졌다. 더 이상의 탐색전이 무의미했다.
"혜수야, 네가 거짓말한 거 알아. 근데, 지금이라도 인정하면 이해해줄게."
이때 혜수가 보인 반응은 교과서적인 '나르시시즘적 격노(Narcissistic Rage)'였다. 자신의 허상이 공격받자, 즉각적으로 방어기제를 작동시킨 것이다.
"합격증 보여줄까? 그 대신 우리 관계는 끝이야."
증거를 요구하자 그녀는 "너한테 실망이다"라는, 전형적인 가스라이팅 멘트를 남기고 잠적했다. 자신의 수치심을 타인에게 투사하여 상황을 회피하는, 아주 고전적인 수법이었다.
사건 2: 자아(Ego)를 지키기 위한 서사화
그렇게 내 인생의 타임라인에서 사라졌던 혜수가 몇 년 후 다시 등장했다. 내 통역사 프로필을 보고 통역 의뢰를 가장해 접근한 것이다. 당연히 통역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 버전의 혜수는 꽤 정교하게 업데이트되어 있었다.
코스메틱 회사 재직 중이고, 개명을 했고, 웰시코기를 키우고 있으며, 자취를 하고 있다고 했다. 심지어 영상 통화로 오피스텔을 보여주고 강아지 사진도 보냈다. 자신의 과거가 '리셋' 되었음을 어필한 것이지만, 나는 여전히 믿지 않았다.
"거짓말하는 건 좀 나아졌니?"
나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이번엔 격노 대신 새로운 방어 기제가 등장했다.
"나 상담받고 있어."
이는 성인 허언증 환자들에게서 종종 관찰되는 특징이다. 자신의 기만을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 불안정한 자아를 지탱하기 위해 '상담'이라는 행위조차 자신의 서사를 강화하는 도구로 이용하는 것이다. 즉, 상담을 받는다는 사실조차 거짓말을 정당화하는 알리바이가 된다.
비극적이었다. 나는 아마 평생 진실을 알지 못할 것이다. 혜수가 정말 취업을 했을 수도 있고, 웰시코기를 키우고 있을 수도 있다. 나는 갱생이라는 개념을 믿는 편이다. 하지만 우리의 상호 주관성(intersubjectivity)은 이미 완전히 파괴되었고, 그 상태에서 언어는 기능을 잃었다. 그녀의 변화가 사실인지 아닌지 판별할 방법이 없다. 직접 현장 검증을 할 사안도 아니고, 솔직히 말해 검증할 의지도 없었다. 그 지점에서 대화는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했다.
마지막 통화: 현실 검증의 실패
가장 최근의 접촉은 2년 전이었다. 전화를 받고 불편함이 먼저 스쳤고, 혜수는 그 기류를 읽은 듯했다. 그리고 즉시 전략을 바꿨다. 동정심 유발. 사람은 ‘도움 요청’ 앞에서 방어가 약해진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잘 알고 있었다.
“나 사실 통번역 대학원 준비하려고… 조언 좀 해줄 수 있어?”
현실적으로 통역은커녕 국어 받아쓰기조차 버거운 친구인데, 아직 제정신이 아님을 확신시켜주는 대목이었다. 나는 헛된 희망을 주입하거나 유머로 대응할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침착하게 말했다.
"거긴 아무나 갈 수 있는 데가 아니야. 상담 더 받아."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이었다.
결론: 악의 없는 병리, 그리고 거리두기
혜수의 거짓말에는 악의가 없었다. 도벽 환자가 물건이 필요해서 훔치는 게 아니라 충동 조절에 실패하는 것처럼, 그녀의 거짓말 또한 신경학적 결함에 가까운 장애다.
앙상한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가상의 세계를 축조해야만 했던 것일까? 정말 모르겠다. 거짓말로 점철된 관계이다보니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그녀의 실체인지를 전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해와 허용은 별개의 문제다. 병적 허언증은 예후가 좋지 않다. 타인의 에너지를 숙주 삼아 기생하는 이들과의 관계에서 최선의 전략은 미움도, 연민도 없이 '완전한 거리두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