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 갑질에 관하여
대학원 졸업 후, 학부 시절 교수님을 캠퍼스에서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다. 안부를 나누다가 통번역대학원이라는 것을 알고 번역 일을 맡기고 싶다며 연락처를 물어보셨다. 처음에는 논문 초록 같은 소소한 작업이었고, 이후에는 꽤 이름이 알려진 국제학자의 저서를 번역할 수 있겠느냐는 제안으로 이어졌다.
다만 조건이 하나 있었다. 책은 교수님 본인 명의로 출간되고, 나는 ‘역자의 말’에 이름이 추가된다는 것이었다.
그 시절의 나는 경험을 쌓는 데 급급했다. 게다가 꽤 저명한 학자 책이어서 재밌어보였다. 그래서 알겠다고 했다.
번역이 거의 마무리될 즈음, 교수님에게서 “얼마를 주면 되겠느냐”고 문자가 왔다. 교수님의 평소 행색이 궁색해 보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기회를 준 것이 고맙다는 마음이 앞섰다. 그래서 시세보다 훨씬 낮은 금액을 제시했다. 계산 근거까지 덧붙여, 대략 100만 원 정도라고 보냈다.
그날 저녁, 완전 잊고 있던 상태에서 교수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받고 정적이 잠시 흘렀고, 드디어 그가 입을 열었다.
“내가 기분이 좀 상했다”
"...?"
차마 돈 때문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기에, 교수님한테 무슨 일이 있었나 싶어 당황했다. 그는 곧 화를 내기 시작했다.
"너 어디서 사회생활을 그렇게 해?"
"다른 누구는 20만 원에 하고, 내가 장학생으로 유학도 보내줬다"
"어디서 싸가지 없게 그런 돈을 불러?"
"번역도 잘하지 못하더만..."
나는 오히려 내가 배려했다고 믿고 있었던 상태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공격을 받은 것이었다. 지금이라면 훨씬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겠지만, 그때의 나는 많이 순수했다. 충격을 받아 거의 울음을 참아야 했다. 그는 그렇게 한참을 몰아붙인 뒤, 더 낮은 금액으로 하자는 암시를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시험하고 우위를 확인하는 행위가 명백히 지위를 활용한 가스라이팅인 것은 알겠는데, 약간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 나는 이미 학부도 졸업했고, 학부 전공 관련 진로를 선택할 마음도 없었고, 그 교수님의 박사과정에 진학할 계획도 없었으며, 그의 전공 분야에 전혀 관심도 없었다. 다시 말해, 그가 나에게 행사할 수 있는 실질적인 권력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믿고 이런 방식의 갑질을 시도한 것일까?
답은 단순하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방식이 너무 오랜 습관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다음 날 다시 전화가 왔다. 여태까지 번역한 파일을 보내달라는 요청이었다. 나는 여전히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지만, 다행히도 파일은 이미 삭제한 뒤였다. 나는 삭제했다고 말했다.
잠시 정적이 흘렀고,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지원이 너 그렇게 안 봤는데, 의외구나.”
그 말은 더 이상 가스라이팅이 통하지 않는 대상임을 인지했다는 신호였다. 그리고 실제로 그 이후, 그는 나에게서 관심을 거두었다.
그리고 몇 개월 뒤 안부 전화가 왔는데, 뭔지 궁금해서 받아보니 상당히 과장된 밝은 목소리로 잘 지내냐고 물었다. 내가 별로 안 반갑게 답하자 "아직 삐졌구나"라며 끊고, 그 뒤론 지금까지 연락이 없으시다. ("삐졌다"는 단어 선택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권력이 인간을 변화시키는 과정은 대개 서서히 진행된다. 냄비 속의 개구리처럼, 어느 순간부터 온도가 올라가 있는지도 모른 채 익숙해진다. 그렇다면 이것은 과연 특정 개인의 인격 문제일까.
특히 학생 시절을 돌아보면, 갑질의 구조를 유지시키는 데에는 주변의 역할도 분명히 존재했다. 이득을 기대하며 불필요하게 몸을 낮추는 사람, 노골적으로 아첨하는 사람은 드물지 않았다. 그리고 반복되는 아첨은 결국 권력을 가진 쪽에게 잘못된 신호를 보낸다. 이 정도의 무례, 이 정도의 요구는 ‘허용 가능하다’는 신호 말이다.
나도 종종 ‘윗사람’과 대화할 때, 그들이 무의식적으로 특별 대우를 기대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반드시 악의적이어서가 아니다. 그런 대우에 너무 오래 노출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들 역시 뉴스에 나오는 갑질 사례를 보며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막상 약간의 영향력을 손에 쥐는 순간, 주변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진다. 웃음이 많아지고, 눈치를 보고, 듣고 싶은 말을 해주기 시작한다. 그 변화에 저항하지 않는 순간, 권력은 자연스럽게 ‘기대’가 된다. 그렇게 이 구조는 재생산된다.
그래서 이 악순환에는 아첨하는 쪽의 책임도 분명히 존재한다.
아첨은 약자의 생존 전략, 불가피한 사회 생활처럼 포장되지만, 실제로는 권력을 비대하게 만들고 기준을 무너뜨리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아첨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권력자는 자신의 판단이 옳고, 자신의 방식이 정당하다고 착각한다.
개인적으로 아첨하는 사람치고 제대로 성장하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일단 아첨에 넘어가는 사람이라는 것 자체가 소인배의 증거다. 남의 호의에 기대어 이득을 취하는 방식은 단기적으로는 편할지 몰라도, 결국 멀리 가지 못한다.
게다가 상대가 유난히 그릇이 큰 사람이 아니라면 그의 버릇만 더 망치게 되고, 본인은 속에 분노와 원한만 쌓이게 된다. 무엇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 태도 자체가 이 더러운 권력 구조를 지속시키는 데 일조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 고리를 끊으려면 질문의 방향부터 바꿔야 한다. 저 사람에게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가 아니라, ‘내가 상대에게 어떤 가치를 줄 수 있는가.’ 결국 기회를 만드는 것은 아첨이 아니라 실력과 태도다.
그러니 빌어먹으려는 마인드는 떠오를 때마다 버려야 한다. 그게 가장 현실적인 선택처럼 보일 때조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