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과의 관계
나는 음식에 있어 기준이 매우 단순하다. '영양의 균형' 그리고 '편의성'.
타인을 대접할 때를 제외하면, 비싸고 예쁘고 맛있는 미식에는 큰 가치를 두지 않는다. 현 삶의 단계에서는 설탕이 없고, 단백질이 충분하며, 만드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으면 된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는 이 단순함이 상당한 까다로움으로 변모한다. 단백질은 지방이 적어야 하고, 탄수화물은 GI 지수가 낮아야 하며, 지방은 불포화지방이어야 하고, 전체적인 '탄단지' 비율도 맞아야 하며, 설탕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기준을 만족하는 후보군만 남기면 일단 고추장, 간장 베이스인 한식은 95% 소거되고, 외식의 선택지는 좁아진다. 결국 '영양의 균형'과 '편의성'을 동시에 만족하는 가장 효율적인 선택지는 하나로 수렴된다. 그래서 일년에 300일 이상 점심은 샐러드만 먹는다.
집에서는 구성이 상당히 단순하다. 단백질은 닭가슴살과 무설탕 비건 보충제, 무설탕 그릭 요거트. (붉은 육류는 지방 함량 때문에 한 달에 두세 번만 먹는다.) 탄수화물은 렌틸콩, 병아리콩, 단호박, 고구마, 무설탕 순수 호밀빵처럼 흡수가 느린 ‘서방형 탄수화물’. 지방은 견과류, 아주 가끔 아보카도. 밀도 높은 불포화지방이 필요하면 연어를 찾아 먹는다.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질리는 순간이 온다. 그런데 그래서? '질리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그저 쾌락의 역치가 높아진 감각의 어리광이 아닌가. 이성적인 성인으로서 삶을 주도하기 위해서는 내면의 아이를 길들여야 하지, 여기에 끌려다니면 안 된다. ‘아, 오늘은 좀 질리네’ 하고 그냥 먹으면 어차피 바쁘다 보니 곧 아무 생각이 없어진다.
간식도 앞서 말한 것과 동일한 항목으로 구성되는데, 설탕과 포화지방만 없다면 종종 다른 선택지도 추가된다.
처음 사회생활을 하면서 생각보다 많은 성인이 과자를 먹는다는 것을 알고 작은 관찰자적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코로나가 잠잠해지고 출근을 하기 시작하니 사무실에는 항상 과자가 구비되어 있었고, 실제 사람들이 과자를 먹는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전까지 과자는 어린이와 학생들만 먹는 건줄 알았다. 과자뿐 아니라 달달한 음료, 떡볶이, 라면, 튀김 같은 음식은 성인이 되면 대체로 멀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절대 이들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고, 왠지 모르겠지만 그냥 그렇게 생각했다.
심지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성인 남성은 초코 우유 같은 것을 먹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존경하는 리콴유가 마일로를 즐겨 마셨다는 말을 듣고는 생각을 바꿨고, 사회에 나와 수 많은 남성들이 딸기 우유부터 토피넛 라떼까지 액상당 음료를 즐겨 마시는 것을 목도하였고, 이 관찰에 근거해 세계관을 조정했다.
주제로 돌아오자면, 그러면 회식 자리에 가거나 친구들을 만나면 어떻게 하는가? 약속이 있는 날에 먹기 힘든 메뉴가 예상되면, 미리 단백질과 탄수화물을 먹고 간다.
어차피 타인과의 식사는 음식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대화와 교류가 핵심이다. 나는 음식을 미리 통제함으로써 확보한 정신적 에너지와 집중력을 상대에게 100% 몰입하는 데 사용하려고 노력한다. 나는 "적극적 경청"의 신봉자다. 이는 사람 만나는 횟수를 대폭 줄인 덕에 개별 만남의 질이 높아져서 가능한 것이다.
물론 나에게도 예외가 있다. 예컨대 친구의 할머니가 손수 만든 음식을 내주신다면 설탕이든 콜레스테롤이든 당연히 감사하게 먹을 것이다.
“건강”은 사회적으로도 무난한 명분이지만, 나는 요청 받지 않은 쓸데없는 조언을 하지 않기 위해 신경을 많이 쓴다. 사실 건강은 부차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건강하게 먹으면 건강할 확률이 높아지기야 하겠지만, 시칠리아에는 매일 파스타, 와인, 초콜렛을 먹고 담배를 태우는 정정한 100세 노인도 있을 것이고, 햄버거와 콜라를 잘만 먹고도 장수하는 워렌 버핏도 있다. 인간의 몸은 단순하지 않다.
즉, 나는 남의 식단에 대해 도덕적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내 방식이 절대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남에게 권하지 않는다. (나는 사실 가끔 과자도 먹고, 아이스크림도 먹는 것이 더 건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 나는 왜 이렇게까지 하는가? 나 자신을 다루는 법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나는 최선의 인간이 되기 위한 과정으로 내면 작업(Inner Work)을 중시하는 편이다. 20년이 넘게 축적된 상처, 감정, 트라우마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부산물을 봉인할 강력한 위력을 찾은 곳이 바로 통제의 힘이었다. 이는 내면이 어느 정도 단련되어 강해진 정신력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던 결과다.
통제하고 있을 때 비로소 안정감을 느끼고, 심리적으로 안정되어야만 비로소 자아 실현을 위해 다른 생산적인 일에 몰입할 수 있다. 사실 이 세상에서 통제하기 가장 만만한 대상이 바로 내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 그리고 나의 시간이다. 음식 통제를 통해 얻은 성공 경험은 곧 '나를 다룰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이어지고, 이는 더 어려운 내면 통제와 외부 목표 달성에 필요한 강력한 기반이 된다.
여기서 반문할 수 있다. ‘통제 성향’ 자체가 강박이니, 고쳐야 하는 것 아닌가? 물론 정공법으로 해결하자면 정신 분석을 받거나 내면 탐구를 통해 강박의 기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서 과거의 상처와 트라우마를 하나하나 치유하는 것이다. 맞긴 한데, 지금 나는 아주 절묘한 균형점에 도달해서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하는 상태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어쩔 수 없이(?) 돈가스를 먹었다고 하더라도 바로 뱉으러 뛰어가거나, 자책감으로 우울하거나, 돈가스를 제공한 자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준의 병리적 강박의 스펙트럼도 아니다. 인생의 최종 목표가 '건강한 자아로서 자기 실현을 하며 사는 것'이라고 했을 때, 지금의 통제는 결과적으로 내 가치를 높여주고 있다. 적은 비용과 시간으로 말이다.
종종 디저트를 안 먹는 것을 보고 “절제력 대단하세요”라는 말을 듣는데, 절제가 아니다. 절제는 먹고 싶은데 참는 것이고, 안 먹다보면 생각이 안 난다. 먹고 싶은 것을 참는 것 보다는, 오히려 같은 음식을 몇 년째 먹는 것이 종종 힘들 뿐이다. 일반적으로 치팅 데이가 필요한 이유도 너무 억압했을 때 터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인데, 애초에 억압이 없으면 이 또한 필요 없다.
반대로 드물지만 뭔가가 정말 먹고 싶으면 먹는다. 예를 들어 작년 5월 3일에는 스콘 3개를 먹었다. 9월 어느 날에는 서브웨이 샌드위치 30cm를 먹었고, 발렌타인 때는 벨벳 케이크를 먹었다.
중요한 건 그 다음이다. 어릴 때의 나였다면 ‘오늘 망했다’며 굶거나 운동으로 스스로를 벌했을 것이지만, 억압이 터진 것이 아니라 완전히 주체적으로 내린 결정이기 때문에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지금은 드물게 일탈을 하더라도 자책하지 않고 그저 ‘잘 먹었다’, ‘오늘 재밌었다’ 하고 넘긴다. 다소 시시한 일탈일지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