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공의 언어 및 다양한 관찰
1869년 수에즈 운하 완공 이전 아시아와 아프리카 사이를 잇는 유일한 무역로는 남아공의 희망봉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남아공의 언어에는 유럽 대륙 외에도 다양한 출처의 역사적 흔적이 남아있고, 타 대륙과 약 300여년 간 단절된 상태에서 발전시켜온 고유의 정체성이 있다.
바나나 = Piesang
영어: banana
한국어: 바나나 (banana)
독일어: Banane
프랑스어: banane
네덜란드: banaan
스웨덴어: banan
러시아어: банан (banan)
스페인어: plátano / banana
이탈리아어: banana
포르투갈어: banana
스페인권을 제외하면 바나나는 비슷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남아공의 바나나는 자바어 pisang에서 왔다. 말레이 쪽과 무역이 활발했던 흔적으로 추정된다. 발음은 [ㅃ피쌍].
Nike = 나이크
독일에서도 관찰한 현상으로, 나이키를 나이크[naɪk]로 정직하게(?) 읽는다. 한국은 유난히 원어 발음을 잘 존중하는 경향이 있어서 제품이든 지명이든 꽤 정확한 편인데, 모국어를 활발히 쓰는 남아공 사람들은 자신 언어 습관에 맞춰 발음해버리는 현상이 있다.
Citroën = 시트룬
프랑스어에서 왔고, ë위에 붙여진 두 점은 분음 역할을 한다. 복모음(dipthong)의 형성을 방지하여 “로엥”의 [ㅗ]와 [ㅔ]이 각각 발음된다는 뜻이다.
상식적으로 아프리칸스에서도 ë는 분음 역할을 하는 줄 알고 있았고, 실제 규칙 상 그게 맞다고 확인했지만, 일상 생활에서는 대부분 사람들이 [시트로엥]이 아닌 [시트룬]으로 발음한다. 언어는 편리함을 기준으로 진화한다.
Banting
남아공 전반에서 영어 사용이 지배적이지만, 다른 영미권에서는 잘 들어보지 못한 단어들이 있다. 저탄수, 고지방, 고단백, 무설탕 식품에는 “케토제닉/Banting”이라는 표기가 있는 것을 관찰했는데, Banting을 검색해보니 18세기 비만 연구를 하신 영국 분이시다.
계몽주의 수백년간 억압되던 지적 해방이 이루어져 얼마나 정직한 팩폭을 하셨을 지 기대되어 나중에 따로 읽어볼 예정이다.
발음 시 단순 모음 선호 현상
내가 워낙 ei, ai, au, äu 등 이중 모음이 만연한 독일어에 익숙해서 그런지, 아프리칸스는 발음 자체가 이중 모음을 기피하고 최대한 구강 구조상 단순한 형태로 진화했다고 느꼈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보어(Boer)*의 원어 발음은 [보어, bɔːr]가 아니라 [부-르, buːr]다. 먹이다를 뜻하는 voer도 헷갈리게 모음이 두 개이지만 발음은 [fuːr]이다.
* 원래 농부라는 뜻이지만, 네덜란드, 독일, 위그노(프랑스계 신교도) 혈통을 가진 아프리카너 정착민들을 가리키는 말로 자리 잡았다. 특히 1830~1840년대 “대이동(Great Trek)” 시기, 영국 식민 지배를 피해 내륙으로 이주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사용되었다. 투박하지만 친근한 어감의 남아공 정체성을 대표하는 단어이다.
탄생과 발전, 의문
아프리칸스는 정교화되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많이 생략되고 단순화된 언어이다. 유럽 이주가 시작된 17세기부터 네덜란드어에서 발전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문법 체계에 네덜란드어와 과감하게 다른 부분이 있다는 점에서 의도된 스핀 오프가 아닐지 의문이 생겼다. 한국어로 예를 들자면, 훈민정음이 반포된 것만 해도 580년이 넘었고, 구어로서 한국어는 고대와 중세, 근대를 거친 언어로 역사와 족보, 근본이 있다. 그에 비해 아프리칸스는 300년 정도 밖에 안 된 신생 언어인데, 이렇게 의도가 들어간 것으로 보이는 문법적 변화가 300년 동안 자생적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을지 의문이 들고, 굳이 그 노력을 했던 의도가 과연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인종 차별
대부분 남아공 백인을 지칭하는 아프리카너들은 심성 자체가 좋고, 베푸는 것과 환대를 좋아한다. 진심으로 인종 차별을 할 사람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다만 교육 수준 차이로 인해 대부분의 메이드가 흑인인 것이 현실일 뿐이다. 사실 능력만 있으면 인종 구분 없이 성공할 수 있는 곳에 비옥한 땅을 축복 받았지만, 믿기 힘든 수준의 부정부패로 인해 기회가 충분하지 않고, 다양한 집단을 아우르는 사회 불안정이 끊이질 않아 모두가 함께 후퇴하고 있다. 고소득 남아공 사람들은 이미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미국, 싱가프로, 태국 등으로 이민을 하고 있는 심각한 브레인 드레인 현상도 진행 중이다.
흑백 갈등 외에도 아프리카 부족 간 갈등이 빈번하고, 인구의 전반적 교육 수준이 낮다. 인구의 80%가 흑인이니, 교육 수준이 낮은 것도 대부분 흑인들일 것이다. 인종 내러티브는 너무 신경증적으로 흘러와서 그 어떠한 언급도 조심하게 되었지만, 나는 내가 인종차별자가 아님을 확고하게 알고 있으므로 편하게 말 하겠다. 아직도 동네 상가 벽에 “암과 발기부전과 에이즈를 고치는 약”, “마음 떠난 사람 붙잡는 약” 등이 광고되는 것은 “미개하다”는 말로 밖에 설명이 안 된다. 나는 이 사람들의 피부색에는 관심도 없다. 중세에 연금술과 괴상한 의술이 성행했듯, 보편적 인류 발전 수준에서 봤을 때 미개한 것이다. 게다가 이곳의 백인이 우위에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제도적으로 흑인을 지원해주는 정책은 도를 넘어서, 공직 인종 비율이 인구 비율과 동일하게 80% 흑인이다. 백인 빈곤 현상도 심각하다. 세뇌된 패배주의에서 죽지 않고 하루하루 사는 빈곤한 백인들의 squatter camp 다큐멘터리를 보고 아주 오랜 만에 문화충격이란 것을 받기도 했다.
이 외에 한 관찰들:
- 먹고 마시는 것을 즐기는 모습이 마치 덩치 큰 호비트족이 아닐까 싶다. 고열량의 영양 밀도가 높은 동물성 식품과 달콤한 디저트를 소비하는 데 심적 거부감이 상당히 낮아서 발육이 좋고 남자 덩치가 크다.
- 직업이 의사인 사람의 대저택이라도 파리, 도마뱀, 원숭이, 박쥐, 거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