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그날은 무더운 여름 아침이었고, 출근길에 코코넛 워터를 마시는 것이 나만의 작은 루틴이었다. 차가운 음료 때문인지, 사무실에 도착하자 곧 복부에 날카로운 통증이 찾아왔다. 이때의 통증은 일반적인 생리통이나 소화불량과는 차원이 다르다. 더 깊고, 더 예리하며, 더 위협적이다.

이 고통을 견디는 데는 순수한 ‘의지력’이 필요했다. 일정 임계치를 넘어서면 뇌로 가는 혈류가 현저히 감소하는 것이 물리적으로 체감될 정도다. 점차 시야는 흐릿해지고, 청각은 멀어진다. 이 과정은 뇌가 ‘의식’을 유예하면서 생존을 연장하려는 신체적 방어 기제로 해석될 수 있다.

이처럼 미주신경성실신은 주로 자율신경계의 급격한 반응으로 인해 발생하는데, 감각 과부하나 스트레스 상황에서 신체가 선택하는 일종의 비자발적 탈출 전략이다. 그러나 체험자의 입장에서 이 현상은 지극히 감정적이고 실존적이다.

의식이 희미해지는 순간은 언제나 죽음과 맞닿아 있다. “내가 여기서 죽는 걸까?”라는 생각이 떠오르고, 그 순간은 단순한 실신이 아니라 존재가 흔들리는 공포로 전환된다. 이런 이유로 미주신경성실신은 종종 공황장애와 혼동되곤 한다. 실제로 그 순간의 불쾌감은 단순한 신체 증상을 넘어서는 차원을 띤다. 이제는 이 증상이 사망까지 이어지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그때는 몰랐다. 매번 처음처럼 죽음의 공포를 호출한다.

그날 도무지 참을 수 없어 회사 탕비실에 누워 있었다. 집에 갈 수도 없고, 응급실에 갈까 판단을 내려야 했다. 말이 탕비실이지, 입구와 연결된 열린 공간 내의 벤치였다. 쓰러진 나를 돌봐준 몇 명의 동료가 있었고, 동시에 힐끗 쳐다보고 지나치는 사람들의 시선도 있었다. 정신은 흐릿했고, 고통은 극심했다. 그 와중에 드는 생각은 단 하나였다.

“내가 정말 여기서 이렇게 죽을 수도 있겠구나.”

진통제를 두 알 먹고 약발이 돌 때 쯤, 정신을 차리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수액을 맞고 회복했다.

‘미주신경성실신’이라는 말은 언뜻 보면 어린 소녀의 이름처럼 들린다. 그러나 나에게 이 단어는 몇 년 전부터 반복적으로 나를 찾아온 일종의 생리적 붕괴의 명칭이다. 우연히 검색을 하다가, 그 명칭 아래에 나열된 증상들이 기이할 만큼 내 경험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고등학생 때부터 꾸준하게 실신을 해왔다.

한여름 밤, 얼린 블루베리에 플레인 요거트를 먹다가, 극심한 고통에 기절 직전까지 간적도 있다. 또 한 번은 고열이 동반된 상태로 서 있다가, 뒤로 그대로 쓰러진 적도 있다. 지하철역에서 실신해 역무원실에 누워 있던 날, 지각을 피하려 전력 질주하고 본관 입구에서 쓰러졌던 고등학교 시절의 아침도 있다.

2년 전 넥슨에 다닐 때도 복도에서 갑자기 쓰러져 구급차에 실려 간 적이 있었다. 차가운 것을 먹었을 때 촉발이 되는 것 같기도 한데, 매번 그런 것은 아니다. 무엇이 결정적인 방아쇠가 되었는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미주신경성실신이라는 것이 대체로 그렇다고 한다. 원인이 불명확하고, 예측은 어렵고, 재발은 반복된다.

미주신경성실신

“내가 정말 여기서 이렇게 죽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