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하다 지친 완벽주의 내향인
사람을 너무 생각하다가, 정작 사람을 피하게 되는 기묘한 역설.

몇 년전, 아잔 브람 스님의 『술 취한 코끼리 길들이기』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이다”라는 문장을 읽었을 때, 그 단순한 명료함은 곧바로 뇌리에 박혔다. 타인과 교류할 때면 나에게 이익이 될까 무의식 중에 저울질하게 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데, 이를 거스르며 박애라는 목표에 한 걸음 가까워질 수 있는 ‘현실적 액션 플랜’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 순간 이 문장은 내 인생의 미니 모토가 되었다.
이후에 꽂힌 개념은 ‘액티브 리스닝’이다. “칼로리가 소모될 정도로 경청하라”는 말이 머리에 각인되고 말았다. 액티브 리스닝은 단순히 ‘조용히 듣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언어뿐 아니라 표정, 어조, 숨은 감정까지 온몸의 신경을 총동원해 읽어내는 고도의 인지 활동이다. 고개를 끄덕이는 단순한 리액션을 넘어 상대의 말 뒤에 숨어 있는 ‘말하지 않은 것’까지 헤아려보려는 태도다. 심리학자 칼 로저스가 말한 ‘공감적 이해’가 바로 이런 맥락이다.
원래도 공감을 잘 하는 타입이지만, 무엇이든 의식적으로 잘 해내기 위해서는 높은 에너지 소모율을 감수해야 않는가. 타인을 진심으로 배려하고 그 사람의 언어와 감정을 온전히 받아내려면, 내 안의 판단과 선입견을 잠시 끄고 정신을 최대한 집중을 해야 한다.
배려의 깊이에는 끝이 없다. 예컨대 노화와 죽음에 관한 책 『Being Mortal: Medicine and What Matters in the End』는 노화가 수반하는 신체적·인지적 변화와 그로 인한 존엄의 흔들림을 집요하게 파헤친다. 정신은 여전히 선명하지만, 몸만 늙어가는 노인들이 겪는 불합리하고 서러운 불편함이 칼날처럼 와닿았다. 책에서는 뼈와 관절이 얇아지고 키가 줄어드는 현상, 염증성 관절염, 골다공증으로 인한 골절 위험, 근육량 감소로 인한 약화, 폐 기능 저하로 인한 숨참, 그리고 시력·청력 감퇴를 상세하게 다룬다. 더 나아가 기억력 저하, 반응 속도 둔화, 판단력의 미세한 약화 등 인지적 변화가 일상의 독립성을 조금씩 갉아먹는 과정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인간이란 결국 ‘자기 몸의 서서히 무너지는 질서를 이해하고 설득하며 살아가는 존재’임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나도 언젠가 이 모든 현상들을 맞닥뜨릴 존재이기에, 그것을 그저 이론으로만 흘려보낼 수 없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나는 어르신 앞에서 본능적으로 ‘보정 모드’를 발동시키기 시작했다. 목소리를 0.4배 높이고, 음도는 3톤쯤 끌어올리고, 말하는 속도는 0.8배 느리게, 리액션은 평소보다 과장된다. 실제로 책에서는 “빠른 읽기나 타자 사용 못하는 어르신이 독서나 이메일 작성조차 포기하게 된다”고 하며, 일상적 활동 능력의 저하가 인간 존엄과 삶의 질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한다. 그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르신들과는 훌륭한 관계를 유지하는 편이다.
이 뿐 아니라, 에블린 크로네의 뇌 관련 저서를 읽으며 각 시기별 호르몬 변화가 사람의 감정, 행동, 에너지 수준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깨달았다. ‘사람은 결국 호르몬의 지배를 받는 생물학적 존재’라는 사실은 충격적이면서도 이상하게 안도감을 주었다. 피로, 예민함, 감정 기복 같은 일상적인 불편함들이 개인의 ‘성격 결함’이 아니라 생리적 조정 과정의 산물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타인을 판단할 때 훨씬 신중해지고 관대해졌다.
타인에 대한 섬세한 배려로 이어지는 학습을 통한 공감대 확장은 내 삶의 지향과 합치되지만, 이런 마음가짐으로 사람을 만나다 보니 매번 에너지가 고갈되었다. 누구를 만날 때 온갖 멘탈 체크리스트를 관리하니 결국 나는 ‘사람을 너무 생각하다가, 정작 사람을 피하게 된 사람’이 되어갔다.
스스로를 소모시키지 않고도 배려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고민하다 보니, 문득 ‘피플 플리징(people-pleasing)’의 잔재가 아직도 내 안에 은근히 웅크리고 있지 않은가를 살펴보게 되었다. 타인의 기분을 과도하게 수습하려는 습관은 결국 ‘경계 설정(Boundary Setting)’의 실패라는 진단으로 이어진다.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초자아는 내재화된 청교도 부모 같은 존재로, 도덕적 채찍을 휘두르는 철학자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남을 배려해야지. 아니면 네가 인류의 의식 진화에 걸림돌 같은 존재가 될 거야?” 반면 이드는 타협을 모르는, 다소 허무주의적인 속삭임을 던진다. “그냥 방구석에 있어. 존재 자체가 소진되면 배려도 사치야” 그리고 정신세계의 중간 관리자 같은 자아는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잡느라 줄타기를 한다.
내향인이라 그런 걸까. 내가 느낀 내향인과 외향인의 가장 큰 차이는 단순했다. ‘소셜 배터리의 용량.’ 외향인은 5,000mAh의 급속충전 보조배터리를 장착하고 태어난 것 같고, 나는 800mAh 구형 배터리를 달고 태어난 것이다. 충전 속도도 느리다. 하지만 사람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사람을 좋아한다. 단지 배터리 용량이 소형 모델일 뿐이다. 본성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배터리를 효율적으로 써야 한다.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눈앞의 타인인 동시에, 내 에너지를 관리해야 할 나 자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