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어 전공자가 공부하는 아프리칸스
* 본인은 통사론이나 음운론 같은 언어학적 지식이 전무하며, 내재화된 언어 지식을 기준으로 의식의 흐름을 따랐음을 밝힌다.
아프리칸스는 게르만어족에 속하며, 17세기 중반 희망봉에 정착한 네덜란드인들으로 부터 시작된 것이기 때문에 네덜란드어와 상당히 비슷하다. 본인은 독일어를 전공하면서 네덜란드어를 잠깐 취미로 배운 적이 있기 때문에 아프리칸스 진입 장벽이 상당히 낮았다.
아프리칸스의 가장 큰 특징은 문법의 복잡성이 상당히 희석된 양상을 보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로맨스어, 게르만어, 러시아어, 아랍어에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동사 변화, 격변화 및 그에 수반되는 어미 변화 등이 전무하다. 앞서 언급한 언어를 한 개라도 배워본 사람이라면 더 크게 와닿을 것이다.
또 다른 특징은 연구개 마찰음(가래 뱉기 전 나는 소리)이 유난히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독일어의 ch, 러시아어의 x, 네덜란드어의 g 발음에 해당하는데, 듣고 있다 보면 유난히 해당 소리가 두드러진다.
이 글에서는 독일어 전공자가 아프리칸스 공부를 시작하며 느낀 특이점들을 정리해보았다.
동사 인칭변화의 부재
대부분 서양 언어에서는 인칭에 따라 동사가 변화하는데, 영어는 3인칭 단수에 -s가 붙는 정도여서 정말 원시적인 편에 속한다. 프랑스어, 스페인어와 독일어만 하더라도 동사는 절망의 늪이다(물론 본인은 재밌었음).
그럼에도 동사변화를 체득하기 위한 지리한 반복과 연습은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관문이다. 특히 회화에 있어서는 문장 구조가 복잡해지면 동사 위치가 변하기도 하기 때문에, 최초에 뱉어낸 주어를 기억하고 올바른 동사를 매끄럽게 구사하기 까지 수 많은 좌절과 인내가 요구된다.
아니 그런데, 아프리칸스는 동사의 인칭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가히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내가 짖든, 개가 짖든, 우리가 짖든, 그들이 짖든 동일한 형태의 동사 blaf가 사용된다는 것.
동사는 사실상 문법의 주인공이기에, 이것 하나만으로 절약되는 학습 시간을 생각하면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이해 안 되는 발음 규칙
그렇다고 아프리칸스가 쉽기만한 언어는 아니다. 전세계 인구 3%만 사용하는 희귀 언어인 만큼 자료가 한정적이고, 발음 규칙이 혼돈 그 자체다. 아래는 몇 가지 패턴들만 적은 것이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개별 사례들이 수도 없이 많다.
부정관사 ‘n
본인이 파악한 아프리칸스의 가장 큰 어려움 중 하나가 발음규칙이다. 그 중 최초로 어이 없음을 선사했던 것이 바로 부정관사 ’n인데, 결론부터 말 하자면 a (UH, 어)로 발음된다.
- ‘n appel (an apple)
일단 생긴 것은 네덜란드어의 부정관사 een의 복모음이 ‘로 축약된 것으로 보이고, 발음은 매우 뜬금 없게도 영어 부정관사 a와 동일하다. 아포스트로피도 눈에 거슬리고, 대체 굳이 이래야 하는 이유가 납득이 가지 않지만 너무 열을 내지 말고 받아 들여야 한다.
지소사 jie의 발음
지소사라 함은 단어를 귀엽게 만들어주는 접미사로, 독일어의 경우 대표적으로 "-chen"이 있다. 이것을 독일어로는 Verniedlichung이라고 한다. (참고로 niedlich는 귀엽다는 뜻의 형용사다.)
- 빵 Brot - 작은 빵 Brötchen
- 고양이 Katze - 작은 고양이 Kätchen
스페인어에서도 -ito/-ita, 이탈리어에도 -ino/-ina가 동일한 역할을 한다. 네덜란드어에서는 -je, -tje, -etje, -pje가 사용되고, 아프리칸스에서는 jie가 사용된다.
- 빵 brood - 작은 빵 broodjie (조어론적으론 이러하지만 사실상 그릴 샌드위치 같은 것을 뜻함)
- 개 hond - 작은 개 hondjie
그런데 j가 영어의 y로 발음된다는 게르만어의 특징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칸스어 broodjie는 브로우키, hondjie는 호잉키로 발음된다. 표기를 j로 해놓고 난데 없이 k로 읽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아서 화를 냈던 기억이 있다. (게다가 hondjie는 혼트키도 아니고 들어보면 호잉키다. 깊은 한숨...)
부정부사 nie의 이중 사용
영어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부정부사 not이 한 번만 등장하는 것에 큰 의문을 갖지 않을 것이다. 다른 게르만어족 독일어와 네덜란드어의 경우에도 각각 nicht와 niet가 대체로 한 번만 등장한다.
- 영어: This is not my house.
- 독일어: Das ist nicht mein Haus.
- 네덜란드어: Dit is niet mijn huis.
하지만 아프리칸스에서는 말미에 한 번 더 등장한다.
- 아프리칸스: Dit is nie my huis nie.
프랑스어에도 부정문을 만들 때 ne pas라는 두 단어가 사용되긴 하지만 계보가 다르기도 하고, 아프리칸스에서는 말미에 등장한다는 점이 차별적이다.
- 프랑스어: Ce n'est pas ma maison.
물론 예외도 있다. 짧은 문장 중 주어 + 자동사 또는 인칭대명사가 주어인 경우에는 nie가 한번만 사용되고, 독일어(네덜란드어)와 마찬가지로 동사 뒤에 위치한다.
- Die hond hardloop nie - Der Hund rennt nicht (The dog doesn't run)
- Sy skryf nie - Sie schreibt nicht (She doesn't write)
참고로 nie는 독일어로 절대부정을 나타내는 부사 never에 해당하는데, 아프리칸스에서는 nie가 두 번이나 사용되어 독일어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어감이 다소 강하게 들릴 수 있다. 아프리칸스에서 절대부정 부사는 nooit이며, 이 역시 nie와 함께 쓰인다.
- Die hond hardloop nooit nie. (The dog never runs)
- Sy skryf nooit nie. (She never writes)
독해가 쉽다
물론 본인이 독일어 C2 소지자이고 언어감이 발달한 편이라 그런 걸 수도 있지만, 긴 학습 시간을 들이지 않았음에도 대부분의 가벼운 글은 의미 파악이 가능하다. 관심 주제 글을 읽고 단어와 표현을 정리하는 것은 실제 자주 사용하는 공부 방법이다. 몇 문장만 의식의 흐름을 따라 기록해보겠다.
“gesonde kos (건강한 음식)”, “wenke (팁)”, “za (네덜란드와 겹칠 수 있으므로 남아공 도메인 확장자를 추가)”라는 키워드를 검색하여 랜덤한 텍스트를 찾았다.
10 maniere om elke dag gesonder te eet
제목부터 사전의 도움 없이 바로 해석이 가능하다. 한눈에 10 Tipps/Wege um jeden Tag gesunder zu essen이라는 독일어가 겹쳐 보인다. maniere는 프랑스어의 manière와 똑같이 생겼기 때문에 “방법”이라고 즉시 유추할 수 있다. “매일 더 건강하게 먹는 법 10가지”
Is dit vir jou moeilik om by 'n gesonde dieet te hou?
첫 문장도 독일어가 겹쳐보여서 즉각적인 의미 파악이 가능하다. “Ist es für dich einfach um bei einem gesundem Diët zu halten?"라고 직역이 되는데, "당신은 건강한 다이어트를 지속하기가 어려우십니까"라는 뜻이다. (참고로 실제 독일어에서 다이어트 얘기를 할때는 "bei... halten"을 사용하지 않고, eine Diät halten, 또는 eine Diät durchhalten과 같은 조합을 사용한다.)
moeilik은 독일어와 다르게 생겼지만 감으로 유추할 수 있고, 사전을 찾아보니 예측이 맞았다. hou라는 동사가 by라는 전치사와 함께 쓰인 다는 사실도 유의미한 배움이다.
너무 덕후같이 더 파고들기 전에 이쯤에서 멈추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결론
독일어 능통자라면 게르만어족의 뼈대만 남은 아프리칸스 문법이 굉장히 수월할 것이다. 글을 읽는 것은 몇 주만 투자하면 가능해진다. 하지만 회화의 경우, 자료가 한정된 가운데 발음을 모방하기도 까다롭고 규칙 자체가 혼란스럽기 때문에 독학으로 실력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단호한 결의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