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생의 이면

주변에서 “브이로그를 해보라”는 말을 다섯 번째쯤 들었을 때, 문득 진지하게 상상해봤다.

갓생의 이면
Photo by Ngo Ngoc Khai Huyen / Unsplash

주변에서 “브이로그를 해보라”는 말을 다섯 번째쯤 들었을 때, 문득 진지하게 상상해봤다. 나는 오래 전부터 새벽형 인간이었다. 대학 시절에는 생체 리듬이 아직 조율되지 않았는지, 밤새 술을 마시고 첫차를 타고 집에 들어오는 날들이 잦았다. 하지만 20대 중반이 지나면서부터는 알람도 없이 새벽에 눈이 번쩍 떠지고, 책상 앞에 앉아 공부를 시작하는 습관이 몸 깊숙이 자리 잡았다. 물론 피로가 쌓이면 주말에는 늦잠을 자기도 한다. 내게 ‘늦잠’이란 오전 6시를 의미한다.

브이로그라니. 해외 피트니스 인플루언서나 브라이언 존슨 같은 사람들의 아침 루틴을 보면, 그들은 스마트폰을 멀찍이 치워두고 해변이 보이는 통창 저택에서 명상과 저널링으로 하루를 연다. 한 편의 라이프스타일 화보다.

반면 나는 그저 평범한 창문이 있는 집에서 4시 50분이나 5시쯤 눈을 뜬다. 첫 행동은 침대 옆 캐비넷에 올려져 있는 스마트폰을 가져와 시간을 확인하고 아직 개장 중인 미국 주식 시장과 코인 거래소를 훑어보는 것이다. 그리고 곧장 주방으로 가서 올리브유를 마시고, 따뜻한 물과 함께 영양제를 털어 넣는다. 그 다음은 2층 작업실로 뛰어 올라가 외국어를 공부하거나 일을 한다.

명상은 내게 졸음을 부르고, 저널링은 밤에나 드문드문 한다. 그것도 우아한 감성 문장이 아니라, 영어·독일어·한국어가 뒤섞인 욕설과 인생의 어두움을 해부한 흔적들이다. 아무리 예쁜 다이어리를 사도 금세 ‘감정 쓰레기통’으로 추락한다. 버릴까 하다가도 그 속에 남아 있는 날것의 감정 덩어리에 묘한 애착이 생겨 그대로 둔다. 사실 이런 정직한 내적 성찰이야말로 진정한 갓생에 포함되어야 할 중요한 요소니까.

아침 루틴에서 미적 요소라 할 만한 건 예쁜 잠옷 정도다. 집 전체에 나름 감성에 맞춰 배치한 인테리어 등도 있지만, 새벽부터 생산성 시동을 거는 나의 동선에서는 크게 강조되진 않는다. 이쯤 되면 ‘미적’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게 민망하다. 가끔은 새벽부터 눈을 번쩍 뜨고 어두운 복층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가는 내가 광인처럼 느껴진다.

겉으로는 미학이 없지만, 루틴의 본질은 ‘몸을 관리하는 방식’에 있다. 저속노화(anti-aging)라는 개념이 지금처럼 유행하기 훨씬 전부터 나는 NMN, NAD, 레스베라트롤 같은 보조제를 챙겨 먹었고, 식단의 주역은 언제나 단호박, 렌틸콩, 병아리콩, 브로콜리였다. 설탕은 거의 입에도 대지 않는다. 그러나 이렇게 철저한 건강 루틴 속에도 ‘연출’이라는 것은 없다. 신속하게 만든 단백질 식사를 컴퓨터 앞에서 먹는 것이 대부분이다.

가끔 식사를 준비할 때도 메뉴는 단출하다. 브로콜리, 단호박, 그리고 소스 한 방울 없는 렌틸 스파게티면. 나에게 요리해주는 건 꽤 쉬운 일이다.

다만 이건 조금 안타까운 부분이기도 하다. 나는 스스로 잘 먹지 않아도, ‘해먹이는 욕구’가 유난히 강한 사람이다. 강아지든, 고양이든, 사람이든, 다른 생명을 먹이는 것에서 강한 즐거움과 만족을 느낀다. 특히 한식 요리에 꽤 자신이 있는데, 해먹일 존재가 없어서 오랫동안 그 욕구가 늘 억눌려 있었다. 다행히 로날드는 전형적인 ‘한국 아재 입맛’이라 된장찌개, 제육볶음, 삼계탕, 그리고 내가 어릴 적 먹던 다양한 밑반찬을 해줄 수 있다. 덕분에 가끔 차려지는 그 소박한 식탁 위에서 묘하게도 이상한 미학이 완성되는 순간들이 있다.

그런데 내 루틴은 식탁에서 끝나지 않는다. 먹는 것만큼이나 운동에도 집착한다. 집 안에 운동 전용 방을 만들어 필요한 기구들을 갖췄지만, 인스타 감성의 예쁜 세트 운동복과는 거리가 멀다. 손에 잡히는 티셔츠와 레깅스를 입고 머리를 질끈 묶는다. 복근도 존재하고, 근육의 라인도 어느 정도 있지만, 일차적 목표가 체형 관리다 보니 고중량 운동은 하지 않는다. 열량 섭취도 전략적으로, 필요한 만큼만 한다. 그래서 힘도 세지 않고 체력 자체는 후진 편이다. 사람 많은 곳을 다녀오면 금세 졸리고, 종종 혈압이 낮아 기절도 한다. 이상한 자세로 자면 사흘 동안 허리가 아프다. 가끔 내 자신을 보면 정말 허술하다.

겉보기엔 ‘갓생 체크리스트’를 다 채웠지만, 브이로그를 구상해보며 본 내 삶은 허점투성이다. 미학적 완성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전략적으로 큐레이팅해야 하는데, 그럴수록 삶이 현실감각에서 멀어지고, 무엇보다 그럴 시간이 있나 싶다. 그럼에도 매일 바쁘게 굴러가다 보니 어느새 이 루틴이 내 몸에 박혀 버렸다. 세련되진 않지만, 묘하게 이 엉성한 루틴이 지금의 나를 가장 잘 설명한다. 언젠가 이 삶을 영상으로 남겨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