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여행기 2: 이민하고 싶은 이유
태국은 인구의 90%가 불교를 믿는 나라이며, 도시 곳곳에 불상을 볼 수 있고, 그 앞에 꽃, 향, 붉은 음료수를 공양하는 문화가 보편화되어 있다. 사당 앞에 높인 붉은 환타, 지나가다가 멈춰 서서 합장을 하고 기도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굉장히 자주 볼 수 있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불교 경전이나 설화에서 자주 들었던 내용이 생각났다. 전생에 부처님이나 사리탑에 꽃을 정성껏 올리거나, 남이 올린 꽃의 먼지를 털어낸 공덕으로 다음 생에 '위덕을 갖춘 아름다운 외모'를 얻었다는 이야기.
그렇다면 태국인들이 남녀를 불문하고 유난히 아름다운 것은, 단순한 유전적 우연이 아니라 오랜 공덕의 축적일까. 실제로 태국 사회에서 아름다운 외모는 전생에 쌓은 '탐분(Tham Bun, 공덕)'의 결과물로 여겨지기에, 치장은 단순한 허영을 넘어 자신의 업을 돌보는 긍정적인 행위로 존중받기도 한다.
반면, 내가 나고 자란 한국의 미는 청순, 순수, 절제에 있다. 하얗고 가느다란 몸, 여리여리한 실루엣이 미의 표준이며 종종 그에 벗어나는 여성에게는 ‘섹시’, ‘건강미’라는 레이블이 별도로 붙는다. 몸을 드러내기보다는 감추는 패션을 선호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이 기준과 명백히 어긋났다. 한국적 미의 질서가 허용하는 이른바 ‘건강미’라는 수사조차 선에서조차 나의 추구미를 수용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청소년기부터 주변인들의 검열에 노출되며, 스스로를 계속 축소시켜야 했고, 성인이 된 후에도 사회생활을 하면서 어쩔 수 없이 옷장을 타협시켜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태국 여성들과 느낀 동질감이 얼마나 큰 해방구였을 지는 대략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드디어 내가 소속될 곳을 찾았구나’는 감격이 물밀듯 밀려왔다.
그곳의 여성들은 XS부터 XL에 이르기까지, 신체 스펙트럼 상 모양과 크기에 구애 받지 않고 자신의 실루엣을 과감히 드러내고 있었다. 정말 다양한 체형들을 볼 수 있었는데, 길쭉한 팔다리를 가진 하이패션 체형, 작고 마른 요정 체형, 심미적인 근육 데피니션이 드러나는 체형, 풍만한 곡선형 등 다양성 그 자체였다. 이들은 각각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 없이, 각자가 도달할 수 있는 최선의 심미적 상태를 구현하는 수행 주체였다.
일원화된 미적 규범에 억눌려 있던 나의 감각이 비로소 확장되는, 형언하기 어려운 인류학적 동질감을 느낀 순간이었다. (물론 밤 거리의 쥐와 바퀴벌레와의 조우가 이 고양된 감격을 어느 정도 조정시켰지만 말이다.)
한국 중장년 여성의 경우, 스스로 ‘여자로서의 정체성’과의 단절을 겸허히 수용하고 '무성적(Asexual) 존재'로 규정하는 경우를 흔하게 볼 수 있으며, ‘아줌마 파마 머리’는 그 결의의 표현이자 통과 의례이다. 반면 태국의 풍경은 사뭇 달랐다. 과감한 컷의 드레스와 굽 높은 구두를 통해 여전히 매력을 전시하고 있었다. 이 해방적인 광경 앞에서, 나는 비로소 이곳을 내 삶의 터전으로 삼기로 결심했다.
이곳은 남자들 조차 아름다웠다. 태국의 상좌부 불교는 성별을 고정된 실체가 아닌 전생의 업에 따라 잠시 머무는 상태로 보기에, 제3의 성(Kathoey)에 대해서도 유독 관용적인 문화를 지닌다. 소년의 마른 근육질 몸에 정교한 의술과 탐미적 집착이 결합된 이들의 신체는, 때로 생물학적 여성성을 압도하는 고혹적인 아우라를 뿜어내며 젠더 퍼포먼스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방콕 길거리는 강남의 의료 자본주의를 연상케 하는 피부과와 성형외과로 빼곡하며, 친숙한 시술의 이름들이 메뉴판에 적혀있었다. 편의점이라는 가장 보편적인 소비 공간조차 한국과는 그 위계가 다르다. 화장품과 스킨케어 섹션은 단순한 구색 맞추기를 넘어 생활 필수재로서의 지위를 점하고 있다. 파운데이션과 콜라겐, 각종 미백 성분들이 일용품의 형태로 유통되는 이 현상은, 태국인들에게 ‘미(美)’란 소수의 전유물이 아니라 누구나 향유하고 갱신해야 할 보편적 권리이자, 현생에서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자기 수행적 공덕’임을 방증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