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보다 사장님이 좋은 이유: 나는 왜 거래적 관계가 더 편할까
관계에 기대를 거두고 나서야 보인 것들
나에겐 ‘거래적 관계’가 오히려 더 편하다.
조건 없이 가까워지는 사이, 이를테면 ‘친구’라는 이름 아래 맺어지는 관계는, 선의를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해나 질투, 감정의 파편이 끼어드는 경우가 잦았다. 반면 일정한 비용을 지불하고 정해진 역할 속에서 만나는 분들은, 그 경계 안에서만큼은 나의 안위를 위해 성심을 다해주신다는 확신을 준다.
주기적으로 찾아뵙는 세탁소 사장님, 미용실 디자이너, 피부과 원장님, 네일샵 원장님. 이분들과의 관계 속에서 내가 ‘잘 되는 것’, 예컨대 세탁물이 말끔히 처리되고, 피부가 좋아지고, 손끝이 예뻐지는 일, 은 곧 그분들의 이해관계이기도 하다. 우리는 서로의 최선을 자연스럽게 기대할 수 있고, 그 기대는 번번이 실망으로 되돌아오지 않는다.
사실 비용 지불이라는 조건만 제외한다면 오가는 감정에 있어서는 꽤나 무조건적인 선의를 받을 수 있다. 그렇기에 웬만한 친구에게도 꺼내지 않는 이야기를 편하게 하고, 그분들도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신다. 진심을 해명할 필요 없이,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주는 이 관계는 오히려 애정으로 다가온다. 물론 모든 사장님들이 친절하신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가는 곳들은 다 친절하셨다.
어릴 적부터 나는 ‘마음이 잘 맞는 친구’를 간절히 원했다. 그런 사람이 되고자 애썼고, 언제나 최선의 선의를 가지고 사람들을 대했다. 그러나 그 노력의 끝에 돌아온 것은 대체로 실망과 환멸이었다. 지금은 인간관계에 대한 기대치를 현실에 맞춰 조정하게 되었다. 그 결과, 오히려 역할과 조건이 분명한 관계 속에서 더 깊은 안도감을 느끼고 있다.
사람들은 종종 돈이 오가는 관계에 대해 ‘진심이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진심이란 무엇인가? 화산 속으로 몸을 던지거나, 총칼 앞에 대신 서주는 것을 바라는 것인가? 보다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가장 낮은 위치에 있을 때 무조건적인 도움을 주는 사람만이 진짜 친구라는 것일까?
실제로 나 역시 그런 도움을 받아본 적도 있고, 누군가에게 그렇게 손을 내민 적도 있다. 그 중 일부와는 여전히 연락을 주고받으며 소중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그 경험들은 참으로 감사하고 아름답다. 하지만 그런 관계는 바란다고 해서 억지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의 흐름 속에서 우연히 경로가 겹친 인연일 뿐이다.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이렇게 썼다.
“각자는 공공의 이익을 의도하지 않아도,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공공의 이익을 증진시킨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 이익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의나 정의가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각자가 생계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성실함, 책임감, 그리고 선의는 단순한 효율로 환원되지 않는 인간적인 감촉이다. 계산된 친절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따뜻함은 단순한 직업윤리를 넘어선다.
관계는 이름보다 내용이 중요하다. ‘친구’라는 명목 아래 뒤엉킨 감정보다, 명확한 목적과 역할 아래 맺어진 관계 안에서 오히려 더 깊은 신뢰가 피어남을 경험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이끄는 그 질서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삶을 조용히 지탱해주는 연대자가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따라 『국부론』이 마음 깊이 새롭게 와닿는다.